초개(草芥)와 함께한 화요일 시인 김영태

  • scene PLAYBILL editor 김일송
  • scene PLAYBILL photography 왕태균

입력 : 2007.07.12 10:58 | 수정 : 2007.07.12 11:02

# prologue


그가 암 투병 중이라는 건 알고 있다. 최근 다리 골절상까지 당했다는 것도. 그래서 망설여진다. 병환으로 거동마저 불편한데 인터뷰 요청이라니, 경거망동 아닌가. 무거운 전화기를 든다. 의외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전해지는 목소리가 정정하다. 투병 중인 사실도, 일흔 넘은 나이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걱정보다 섭외는 쉽게 이뤄진다. 시를 쓰고 무용과 음악 평을 쓰고, 글과 그림을 그리는 김영태 인터뷰가. 예로부터 그림과 글씨, 글을 고루 잘하면 삼절(三絶)이라 했다는데, 그가 꼭 현대판 삼절이다. 하지만 익숙한 표현으로 ‘시인’ 김영태라 칭자. 무용도, 그림도 모두 말 없는 시니까. 그가 흰 종이에 펜으로 남기는 모든 자취들이 바로 시니까.



 
# 1
인터뷰 출발 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한다. 김영태. 밤새 한 건의 기사가 추가되었다. 기사는 전날 수목장을 치른 시인 오규원에 대한 D일보 기사다. 기사의 말미에 김영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투병 중인 김영태 시인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보내왔다.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자칫 지각할 판이다. 얼른 노트북을 덮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선다. 파란불과 빨간불이 교차하기 십 수번, 가까스로 약속 시간 전에 시인의 자택 앞에 도착한다. 시집 <결혼식과 장례식> 서문처럼 그의 ‘아파트 옆 숲속에 서빙고역이 저만치 서있다. 기차가 지나가고 언제나 안개가 꼬리를 감춘다.’
 
# 2
딩동.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딩동. 기적소리에 묻혔는지, 차임벨이 고장 났는지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딩동. ‘급히 병원에 다니러 가신 건 아닐까’ 걱정도 잠시, 조심스레 문이 열린다. 경망스레 세 번이나 차임벨을 누른 것이 민망하다.
<그늘 반근>에서 시인은 ‘되돌아보면 그늘과 나는 인연이 깊다. 그게 내 모습이기도 하니까’라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그늘져 있다. 한 근이 아닌 딱 반근의 무게만큼 그늘졌다. 어둠 속에서 목발을 짚은 시인이 반긴다. 불을 밝히자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몸을 드러낸 모든 것은 부서질 듯 위태하다. 김영태 그 마저도.
휠체어에 옮겨 앉은 시인은 조용히, 연약한 손으로 두 편의 원고를 건넨다. 인터뷰 진행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아 미리 작성한 원고다. 한 편의 원고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참고문헌 목록이 적혀 있다. 원고 상단에는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라 적혀있다. 또 다른 원고에는 ‘플레이빌 인터뷰 하러 오던 날 쓴 詩’가 적혀 있다. 그리고 테이블 한편에 4권의 책이 놓여있다. 1, 2권과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그리고 <저 멀리 크리스탈>이. 약력을 참고하라는 시인의 배려다. 시인은 책을 가져달라고 주문하고는 한 권, 한 권 사인을 한다. 草芥訥人. 초개눌인. 지푸라기라는 뜻의 초개는 작고 하찮음을 의미하고, 눌인은 어눌한 사람을 말한다. 시인이 자신을 낮춰 표현하는 말이다, 초개눌인. 이쯤에서 초개눌인 김영태를 소개함이 의무요, 예의다. 잠시 딱딱한 어투로 그를 설명한다. 


# 3
김영태는 1959년 ‘雪景’으로 <사상계>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1965년 첫 시집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을 낸 시인은 이후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을 냈다. 그의 모든 시는 시선집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무용평을 시작한 건 1969년의 일이다. 그 전에는 잠시 연극평을 쓰기도 했다. 음악을 사랑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음악과 結婚할까 했지요 / 춤을 만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라며 시인이 ‘남몰래 흐르는 눈물 15’에서 했던 고백이 그 사랑의 증표다.
무용평론으로 돌아선 것은 무용 대본이나 무용평이 그의 적성에 맞은 탓이다. 이후 13권의 무용평론집을 냈다. 스스로에 대해 ‘사시사철 춤 보러 다니는 구경꾼’이라 소개할 정도로 그는 1년 내내 춤 공연장에 앉아있었다. 그의 시 제목인 ‘문예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처럼 한때 문예회관(지금의 아르코예술회관) 대극장 가열 123번은 김영태의 지정석이었다. 보통 저녁나절 그를 만나려거든 그 자리로 가면 됐다. 30년 넘게 그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으니까.
시, 음악평, 무용평 등의 글만이 아니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의 표지를 장식하는 시인의 캐리커처 중 절반이 그의 작품이다. 참고로 나머지 반은 이제하의 작품이다. 아차, 김영태의 중요한 약력을 누락했다. 시인의 약력에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출신이란 점을 추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선 그가 화가보다는 시인이라는 게 더 특이한 일이라면 특이한 일. 어쨌거나. 그는 시인만 그린 게 아니다. 그가 그린 인물이 모르긴 몰라도 문인, 화가, 음악가를 포함해 1,000명은 쉬 넘지 않으랴 싶다. 무대 위 이름 없는 무용수를 합쳐서.
삼절이라 표현했는데, 어디 그림 분이겠는가. 그는 글재주에도 일각연이 있어, 글도 그린다. 요즘 말로 캘리그라피다. 그의 책 중 대개의 제목들은 모두 그가 그린 캘리그라피로 인쇄되어 있다. 비단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남의 것도 그렸다. 영화계에서 우스갯소리로 ‘누가 출연한 영화와 출연하지 않은 영화’로 가르듯, 한때 무용 포스터는 그의 캘리그라피로 제목이 박힌 포스터와 그렇지 않은 포스터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짧은 약력이지만 대략은 그렇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오자. 

 
# 4
아무것도 하도 있지 않을 때가 내게는 가장 불행한 때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것은 접촉?관계?얻음?잃음?시작의 변주(變奏)다.
<결혼식과 장례식>의 뒤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글의 일부다. 시인은 시지프스다. 움직이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형벌을 받은. 그런 그가 지금 불행 속에 잠겨 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몇몇 월간지에 기고 중인 글 쓰는 일을 제외한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다. 매일을 하루처럼 지키던 객석도 지키지 못할뿐더러, 혜화동 작업실에도 나가지 못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위(無爲)는 그에게 요관암(尿管癌)보다, 다리 골절보다 더 아픈 병이다.
물 잔을 건네받은 시인은 휠체어에 앉아 조용히 원고를 읽는다. 조금, 아주 조금의 물로 목을 축은 시인은 느릿느릿 원고를 읽는다. 친절한 설명을 더해.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 와병중(臥病中)이라 대답을 많이 못합니다....... ‘물거품을 마시면서, 아껴가면서’는 저기 있는 저 책의 제목이에요. 그리고 내 삶의 신조이기도 하고요. 물거품도 아껴 마시면서 살아 왔어요.”
작은 것에 대해 집착하고, 에릭 사티에게 배운 ’구석의 아름다움‘을 몸소 실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눈물을 흘리진 않는다. 시인이 무용을, 음악을, 시를 사랑했던 이유는, 4평 남짓한 작업실과 18평 남짓한 집을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작은 것, 구석진 것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자, 예술가는 천형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 측은지심이 지금의 시인을 만들고 지탱해 온 건 아닐까. 


# 5
그렇게 자신의 신조를 설명하고, 자신의 지난 행적을 읊은 그는 천천히 ‘플레이빌 인터뷰 하러 오던 날 쓴 詩’의 전문을 읊기 시작한다.


끝이 보이나?
보인다
껌껌하던가
내려가는 층계가 낯설다
허리에 감겨 있던
제물에 풀려
지던 손
끝이 보이나?


암 투병중인 시인은 항암주사를 맞고 있다. 그것이 어찌나 괴로운 것인지, 하루 2시간을 채 못자는 불면의 밤이 계속된다 한다. 시는 잠들지 못하고 미명을 맞이한 시인이 작성한 시다. 새벽을 맞으며 ‘죽음의 문턱에 와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쓴 시다. 전문을 읊은 뒤 시인은 말한다.
“절망적이거든요. 이런 게(요관암과 다리골절) 양쪽으로 올지는 몰랐어요.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죽음에 대한 예감도 들고. 벌써 일흔 둘이나 됐고.”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든 이유는 시인이 앓고 있는 병과 함께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한, 자신보다 여덟 살 아래 연배의 후배에게 있다. 후배를 먼저 보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끝이 보인다’고 표현하며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었다 한다.
침잠한 분위기를 바꿔볼 겸 기브스에 쓰인 ‘화이팅 샘’으로 화제를 바꿔본다. 기브스에 이렇게 쓰면 빨리 낫는다고 후배 무용가들이 적어준 거란다. 항암주사를 맞으니 뼈가 약해져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졌는데 이렇게 고생 중이라며 시인은 말한다. 다시 또 분위기가 어두워져서 이번에는 모자로 화제를 돌려본다. ‘머리가 빠지면서’ 쓰기 시작했다는 말뚝벙거지. ‘일부러, 아니 무심하게 꾸미는 게 멋’이라며 시인은 언제나 벙거지를 고집했다. 벙거지 챙 아래로 흩날리는 머리는 마치 보헤미안의 자유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항암치료를 자는 시인에게는 자유의 머리칼이 없다. 시인은 거울 앞에 서는 게 싫다 한다. 숱이 다 빠진 머리는 보는 게 싫다 한다.
인터뷰는 여기까지다. 말하는 건, 많은 말을 하는 건 시인에게 고통이다. 촬영이 시작된다. 가장 편한 자세에서 촬영을 시작한다. 뭔가 쓰고 있는 모습을 담고 싶다는 포토그래퍼의 주문에 원고지를 건네받은 시인은 무언가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편안한 표정으로. 포토그래퍼의 주문은 거기까지다. 여느 때와 달리 포토그래퍼의 주문도 많지 않다. 찰칵, 찰칵, 찰칵. 슥, 슥, 슥. 찰칵, 슥, 찰칵, 슥. 카메라 셔터소리와 원고지 위로 펜 스치는 소리가 침묵을 깬다. 포토그래퍼에게는 짧은, 그러나 시인에게는 긴 시간이 흘렀다. 촬영을 마쳤을 때 원고지에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되어 있었다. ‘벌써 시 한 편 지으셨어요?’ 질문에 시인은 ‘그냥 끼적인 거죠’라 답한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또 한 편의 시였다. 그 원고지에는 어떤 글이 남아있을까?
 
# 6
어느 때보다 빨리 끝난 인터뷰다.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포토그래퍼와 담배 한 대를 나눠핀다. 인터뷰가 끝났지만 후련하지가 않다. 오히려 마음속에 묵직한 돌덩어리가 남아있다. 서로는 말을 아끼고 담배만 피울 뿐이다.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생각의 발로는 같을 것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이 코너는 살아생전에 원로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획되었다. 시인처럼 죽음을 예감한 경우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수 백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고 글을 써왔지만, 이렇게 묵직하고 아픈 건 처음이다.
담배를 비벼 끈다. 각자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서울의 도로 사정은 말이 아니다. 갑갑해져 온다. 도로 정체 때문이 아니다. 시인에 대해 어떻게 써야 할 지 마음이 갑갑해져 온다. 아픔을 감추어야 하나, 드러내야 하나? 죽음의 문제를 피해 갈 것인가, 정면으로 받아 쓸 것인가? 발문은 어떻게 뽑고,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인터뷰 전의 모든 가망(可望)이 절망(絶望)으로 변했다. 초개와 함께 한 화요일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많은 화요일이 지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할 것 같다.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다
인간은 나이 들어
한 장의 뒷모습을 두고 간다
- 김영태 ‘뒷모습’ 中  



 
# epilogue


시인에게 두 가지 간절한 소망을 바라본다. 끝이 아니길. ‘플레이빌 인터뷰 하러 오던 날 쓴 詩’의 원제(原題)는 ‘끝’이다. 후일 그의 시선집에 ‘플레이빌 인터뷰 하러 오던 날 쓴 詩’가 한 페이지를 장식하길. 원제 ‘끝’이 아니길. 이것이 욕심이라면 다른 하나의 소망은 꼭 들어주시길. 오늘의 인터뷰가 ‘끝’이 아니길. 쾌차하셔서 아주 먼 훗날로 ‘끝’을 유보해 주시길.


* 2월 28일, 수요일 오후 2시-7시 사이에 동숭동 cafe 張에서 김영태 바자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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