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6.12 09:17
curtain call

Cogito ergo sum. 소리 내어 발음하면, 코지토 에르고 숨. 르네 데카르트로 인해 유명해진 이 표현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뜻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의심. 다른 말로는 방법적회의론이라 부른다. 데카르트는 이 의심의 체에 세상 모든 것을 넣고 흔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의심의 체를 통과하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없었다. 단지 의심의 주체인 데카트르 자신만이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거기에서 유래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다.
여기 데카르트만큼 의심 많은 수녀가 있다.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의 원장 수녀인 그녀의 이름은 앨로이셔스(예수정 분). 그리고 앨로이셔스와 갈등을 이루는 플린 신부(남명렬 분)가 있다. 플린 신부는 마을 주민과 학부형들로부터는 대중적 인기와 명망을, 앨로이셔스 수녀로부터는 끊임없이 추궁을 받는 인물. 앨로이셔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품은 의혹은 학교의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뮬러와 플린 신부와의 관계다. 플린 신부를 소아성애증환자로 의심하는 앨로이셔스 수녀의 관심사는 플린 신부와 도널드 뮬러의 ‘부적절한’행위여부를 증명하는 것이다. 제목답게 ‘의심’을 다루는 연극 <다우트>의 주인공은 의심이며,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작품에서 승리는 주인공의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전리품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을 의미하는 단어로 ‘도그마’라는 단어가 있다. 비평용어로도 흔히 쓰이는 도그마는 본래 철학자들의 견해와 학설을 의미하다가 18세기 이후에 ‘교회 교리’라는 의미로 고착되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비판과 증명이 허용되지 않는 교리, 교의, 교조 따위를 뜻하게 되었다. 작품으로 돌아와 <다우트>의 공간이 되는 가톨릭 학교는 바로 이 도그마가 지배하는 세계이고, 신부와 수녀는 이 도그마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하지만 플린 신부는 ‘일반’ 교회 교리에 위배되는 동성애자 ‘혐의’가 있고, 앨로이셔스 수녀는 하느님의 사자인 신부를 의심한다. 다시 말해 앨로이셔스 수녀나 플린 신부는 모두 종교적 도그마를 위배하고 있는 것으로, 연극 <다우트>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도그마에 대한 도전. <다우트>는 종교적으로도 도그마에 대해 도전하고, 예술적으로도 도그마에 도전한다.
<다우트>는 종국에 의심의 승리를 이야기 한다. 앨로이셔스로부터 반박할 수 없는 증언을 듣게 된 플린 신부는 결국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를 떠나게 되니까. 하지만 이런 결론이 ‘진리의 최대의 적은 맹신’을 뜻하진 않는다. <다우트>는 단순한 흑백논리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플린 신부와의 싸움에서 승리자인 앨로이셔스 수녀에게는 의심만이 승리의 전리품으로 남겨짐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종교적, 예술적 도그마에 의혹을 품게끔 이끈다.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그러한 불신.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을 가르치려 한다. 그것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을 믿어서는 안 될 것이며, 밝은 빛은 일시적인 암흑이라 불러야 될 것이다. 이것이 그대들이 가야할 길이다.’
수많은 잠언을 남긴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필론의 입을 빌려 인용한 바와 같이 불신예찬론(不信禮讚論)을 펼친다. 니체에게 있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란 다름 아닌 불신. 그러나 니체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불신이 인간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기는 하나, 그 길이 과실나무와 아름다운 들판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지 말라며.
앨로이셔스 수녀는 의심하고, 의심했다. 그녀의 근거 없던 확신은 의심을 통해 근거를 찾게 되었다. 그렇지만 앨로이셔스의 모든 의혹이 풀렸다고 모든 사건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진 않는다. 의심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결국 그녀는 과실나무도 아름다운 들판도 찾지 못했다. 남겨진 것은 의심뿐이었으니.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