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5.17 08:52
현대 작가들 가운데 단테와 밀턴, 둘만이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하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에는 기괴한 것과 숭고한 것이 뒤섞여 있다.
-빅토르 위고, <크롬웰> 서문 中
‘훌륭한 작품이란 기괴한 것과 숭고한 것이 뒤섞여 있는 것’이라던 위고의 말에 부응하는 21세기형 단테와 밀턴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기괴한 것, 추한 것, 더러운 것들을 모조리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들은 생생한 사회의식, 일상을 포착해내는 살아있는 눈을 통하여 자신들의 무대가 현대사회를 보여주는 작은 거울이 되기를 원한다.
현대무용의 메카 벨기에, 그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유럽 최고의 댄스 시어터, ‘쎄드라베 무용단(Les Ballets C. de la B.)’. 1984년 안무가 알랑 플라텔(Alain Platel)에 의해 창단된 예술가들의 공동 집단으로, 현재는 알랑 플라텔과 크리스티네 드 슈메트, 코엔 아우구스티넨, 이렇게 세 명의 안무가들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벨기에의 현대 발레단(Les Ballets Comtemporains de la Belgique)’. 허나 ‘발레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이들의 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심미적이고 정형화된 표현방식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벨기에의 현대 발레단’이란 그 자체로 반어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단체명인 셈. 이처럼 이들은 ‘발레단’이라는 이름 하에 ‘발레단’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국제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무용 단체 중 하나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랑 플라텔이 있었다.
그 무엇도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결코 양자택일할 수 없다.
그는 대립되는 것을 끌어안고 양극단의 것들을 한데 결합시킨다.
- 벨기에 쎄드라베 무용단의 ‘알랑 플라텔’ 소개글에서
첫 작품인 <엠마 Emma>(1988)로 본격적인 연출·안무 작업을 시작한 알랑 플라텔은 이후 9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봉쥬르 마담 Bonjour Madame>(1993), 부랑자·레슬링선수·시위운동가 등이 모여 있는 집을 통해 도시 생활의 명암을 그린 <바흐에 관한 무엇 Iets op Bach>(1998), 런던 곳곳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합창단들을 불러 모은 <내가 노래하기 때문에 Because I Sing>(2001), 모차르트의 음악을 모티브로 한 <볼프 Wolf>(2003) 등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쎄드라베 무용단을 어떤 틀로도 가둘 수 없는 다양하고 진보적인 작품들을 배출하는 산실로 자리 잡게 했다. 특히 정식 무용교육을 받는 대신 현장작업을 통해 안무와 연출을 익히고, 한때 장애 어린이 전문치료사로서 일하기도 했던 그의 범상치 않은 이력은 그만의 작품세계를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진정한 예술이란 삶의 작은 축소판이 되어야 한다’는 신조 아래 동물과 어린이, 장애인, 곡예사 등 소외된 사람들을 무용수와 함께 무대에 세우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몸짓,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보여주려 하는 기존의 무용단들과는 달리, 그는 쎄드라베 무용단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그의 일상적이면서도 일그러진 움직임은 아름다움과 추함, 고상함과 저속함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의 누추한 삶을 온화한 시선으로 끌어안았다. 또한 그의 독특한 표현력과 호소력 짙은 연출은 쎄드라베 무용단은 물론 벨기에 무용 자체를 여타 유럽 무용들과 월등히 차별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알랑 플라텔의 무용수들은 타고난 예술가이다.
그들은 모든 경계를 부수며 우리를 기겁하게 하고, 동시에 감동시킨다.
- Financial Times, 영국
쎄드라베 무용단은 정규 무용단원을 두는 대신 그때그때 오디션을 통해 무용수를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늘 유명무용수의 출연만을 고집하는 국내 무용단의 관행과는 사뭇 다른 선진화된 시스템. 또한 이들은 단원 오디션을 치르기 전 음악, 무대, 의상은 물론이고 투어일정까지 신작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해 놓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모든 시스템이 최고의 무용수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내게끔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뽑힌 단원들에게는 작품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하고 비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는 그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것을 적극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안무가는 단원들에게 각자 생각했던 것을 몸으로 직접 표현해 볼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단원들의 평상시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여 개개인의 특성과 성격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채택하기도 한다. 쎄드라베 무용단에서는 무용수들의 그 어떤 아이디어에도 미리 한계가 그어지는 일이 없으며 반대로 무용수 한 명의 의견으로 작품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고찰될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쎄드라베 무용단은 유럽 무용수들에게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Everything can do everything)’ 무용수들의 유토피아로 여겨지기도 한다.
2006년 발표된 쎄드라베 무용단의 신작 <저녁기도 Vsprs>가 오는 25일 한국 무대에 선다. 몬테베르디의 종교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벨기에·베트남·프랑스·스페인·뉴질랜드·네덜란드·영국·미국 등 다국적 무용수들 10명이 총출동할 예정. (이중에는 한국인 무용수 예효승도 있다!) 다양한 국가의 무용수들이 뽑은 이유는 서로 다른 특성이 공존하는 현실세계를 무대 위에 그대로 창조해내기 위함이라고. 게다가 실제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동의 환자들의 움직임을 촬영한 영상자료를 토대로 자기 통제력을 잃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무대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았다고 하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쎄드라베 무용단다운 작품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참, 무대에서 보게 될 이들의 충격적인 무대에 너무 놀라지는 마시길. ‘진실’이란 언제나 충격적인 법이니까.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