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2.12 22:52
[인터뷰] 민정기… 정상회담장에 걸린 ‘북한산그림’ 작가
“산과 도심 누비며 발품 팔아 답사 스케치”
‘MIN JOUNG-KI’展 3월 3일까지 국제갤러리
지형적 구조와 역사성 담은 2m 넘는 대작 선봬
자연 풍광서 도심 풍경으로 변모한 예술 여정 한눈에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도 민정기(70)의 캔버스에선 산수화처럼 평온하고 온화하다. 도심을 따라 병풍처럼 두른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을 등진 도심 풍경이 2m 크기의 화폭에 고요히 펼쳐진다. 민정기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풍경을 현실적이면서도 인문적인 성찰의 결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에 걸렸던 <북한산>(2007)에서와 같이 산세, 물세 같은 지형적 요소와 그 안에 어우러진 인간의 흔적을 중점적으로 다뤘지만 근래 들어 그의 관심은 자연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서울 곳곳에 산재한 건축물과 터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재구성하는 작업을 이어오며, 그중 청계천, 사직단, 세검정, 백사실계곡 등에 주목해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듯한 풍경을 그려낸다.
1980년대에도 도시를 그렸지만 자의적인 기호가 주를 이뤘던 당시 그림과 풍경에 역사와 지리를 녹여낸 현재의 그림은 확연히 구별된다. 근작에서는 작가가 직접 ‘인연’이라 지칭하는 여러 장소들과 그에 관련된 역사가 수수께끼처럼 얽힌다. 그 장소들은 고정된 하나의 관점에서 제시되기보단 두 가지의 이상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 또한 이전과 다른 지점 중 하나다.

<유몽유도원>(2016)은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오늘날 부암동을 병치함으로써 이곳의 태곳적 지세와 변모한 풍경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수입리(양평)>(2016)은 동양화의 전통적인 부감법과 투시도법을 재해석해 산천 풍광을 민화적으로 풀어내는데, 역사를 화면 안으로 끌고 들어와 과거와 오늘날의 공존을 다시점으로 시각화한다.
그의 작업에서 장소성은 중요한 화두다. 해당 장소의 지형적, 지리적, 인문학적 지식이나 역사를 바탕으로 그곳만의 독자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다. 지명이나 고유명사를 작품명에 직접 차용하는 것 역시 민 화백의 이러한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천착해온 산세와 물길 외에도 도로, 도심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의 범주는 지금도 확장 중에 있다.
민중미술로 대표되던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화풍이 변모하기 시작했으나 그 이름표를 완벽히 떼어내진 못했다. 그러나 작년, 그의 작품 한 점이 남북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의 뒷배경으로 등장, 인지도가 급상승하며 작품가가 꿈틀하고 있다. 이후 달라진 점이 있냐는 물음에 “그림에는 다 쓰임새가 있는 법인가보다”라고 답했다. 녹지와 개천도 모자라 이제 서울 곳곳을 누빈다는 민 화백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만났다. 지난해 판문점에 걸린 뒤 처음 갖는 이번 전시는 3월 3일까지 이어진다.

─자연과 상반되는 도시로 눈을 돌린 이유는.
“시골풍경만 그리면 사람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복잡한 분위기도 병행해야 균형이 맞는 것 같다. 물론, 양평으로 오기 전까진 줄곧 서울에 살았으니 도시가 낯설지도 않다. 양평에서 서울까지 한 번 올라오려면 일이라서 그렇지.(웃음)”
─1987년 서울에서 양평으로 이주할 때가 30대였다. 도시 생활을 접기엔 이른 나이였지 않나.
“선친 묘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 거니 연고가 없던 곳으로 간 건 아니었다. 성묘 다닌다고 자주 가봤으니 익숙하기도 했고… 사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어려웠던 기억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것에 지쳐 시골로 일찍 내려가고 싶었다.”
“선친 묘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 거니 연고가 없던 곳으로 간 건 아니었다. 성묘 다닌다고 자주 가봤으니 익숙하기도 했고… 사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어려웠던 기억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것에 지쳐 시골로 일찍 내려가고 싶었다.”
─양평에 정착하면서 산천을 소재로 삼게 됐을 거라 짐작하게 된다. 보고 접하는 것이 죄다 자연 풍광 아니었던가.
“그렇다. 양평에 가면서부터 작업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인물 중심의 그림이나 ‘이발소그림’을 연상하는 키치(Kitsch)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작업실 주변 풍경에 관심을 돌렸다. 그 후 점차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됐다. 숨은 계곡과 지형을 따라 산세를 파악하기 위해 답사는 물론, 연구하면서 이들을 한 화면에 죽 펼쳐내는 재미에 빠진 거다. 몸소 다니며 기억하는 길을 도해적이고 지리적으로 배치한다.”
“그렇다. 양평에 가면서부터 작업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인물 중심의 그림이나 ‘이발소그림’을 연상하는 키치(Kitsch)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연스레 작업실 주변 풍경에 관심을 돌렸다. 그 후 점차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됐다. 숨은 계곡과 지형을 따라 산세를 파악하기 위해 답사는 물론, 연구하면서 이들을 한 화면에 죽 펼쳐내는 재미에 빠진 거다. 몸소 다니며 기억하는 길을 도해적이고 지리적으로 배치한다.”

─그런 이유로 대작을 즐겨 작업하는 것인지. 이번 출품작들도 2m가 훌쩍 넘는다.
“산세나 물길을 구조적으로 드러내려면 클 수밖에 없을뿐더러 작품이 커야 이야깃거리를 풀어낼 수 있다. 신작 <사직단이 보이는 풍경>과 <인왕산>은 병풍 형식에 착안해 여러 개로 화폭을 나눠 구성해 대형 작업할 때 으레 겪는 불편함을 좀 줄였다. 요새는 전시장이 엄청나게 크다. 웬만한 작품 크기로는 전시장을 메우기 어렵더라.”
─다시 도시 그림 얘기로 돌아와 보자. 청계천, 사직단 등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도시 풍경을 그렸는데 어떤 기준으로 선택된 장소들인가.
“도시와 산이 어우러져 좋은 경치를 이루는 위치를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들은 산과 도시를 이어주는 구실이 되는 셈이다. 인왕산, 백악산, 북한산 등등… 도시 그림이라고 불러도 여전히 산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도시와 산이 어우러져 좋은 경치를 이루는 위치를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들은 산과 도시를 이어주는 구실이 되는 셈이다. 인왕산, 백악산, 북한산 등등… 도시 그림이라고 불러도 여전히 산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한 화면에 여러 구도와 시점이 공존하며 각기 다른 시공간을 콜라주해 과거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공시성(共時性)은 도시 그림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풍경을 한 방향에서만 바라보니 지루해서 도입한 내 나름의 요령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나무나 건물을 삽입한다거나 반대로 삭제한다. 예전 풍경을 빌어 오늘날의 모습을 화면에 담기 위함이다. 두 대비를 통해 현재 풍경이 더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를테면 <청풍계> 연작에 지금은 불타 없어진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을 그려 넣는 식이다. 일제강점기가 영원할 줄 알았을 당시 인물의 오만함과 망상을 바탕으로 해당 위치가 얼마나 명당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다. 내 그림에선 그 크고 화려한 서양식 건축물이 깔보듯이 위에서 아래를 오만방자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같은 장소를 두고 서로 다르게 그린 최신작도 눈에 띈다. 동일한 곳을 두 번이나 그린 까닭은.
“같은 건물이라도 다른 위치에서 보니 내 눈엔 그렇게 색다를 수가 없더라. 이쪽에서 보면 북악산이 보이고 저쪽에서 내려다보면 북한산 연봉이 보이는데, 둘 중 하나만 택할 수가 있겠나. 모든 걸 담아보려고 시도한 거다.”
“같은 건물이라도 다른 위치에서 보니 내 눈엔 그렇게 색다를 수가 없더라. 이쪽에서 보면 북악산이 보이고 저쪽에서 내려다보면 북한산 연봉이 보이는데, 둘 중 하나만 택할 수가 있겠나. 모든 걸 담아보려고 시도한 거다.”
─주로 녹색을 다뤄왔지만 근작에 들어서며 적색계통의 따뜻한 컬러가 등장, 작품 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연이라도 항상 초록빛을 띠는 것은 아니다. 겨울철 풍경은 낙엽들로 인해 붉은색이 돈다. 너무 춥거나 더운 계절을 피해 작업하기 마련이니 녹색을 자주 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오대산 그림 등에서는 녹색이 아닌 청색 계통을 써서 코발트 빛깔을 살리기도 했다. 즐겨 사용하던 색상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도 달라졌다. 아무래도 붉거나 노란 컬러, 분홍색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 부드럽고 따뜻한 색을 따라가는 것 같다.”
“자연이라도 항상 초록빛을 띠는 것은 아니다. 겨울철 풍경은 낙엽들로 인해 붉은색이 돈다. 너무 춥거나 더운 계절을 피해 작업하기 마련이니 녹색을 자주 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오대산 그림 등에서는 녹색이 아닌 청색 계통을 써서 코발트 빛깔을 살리기도 했다. 즐겨 사용하던 색상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들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도 달라졌다. 아무래도 붉거나 노란 컬러, 분홍색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 부드럽고 따뜻한 색을 따라가는 것 같다.”

─요즘엔 위성으로 지구도 내려다보는 세상인데, 얼마든지 인터넷으로 편하게 현장을 확인할 수도 있지 않나.
“꼭 내 발로 답사하고 내 눈으로 봐야만 한다. 사진도 여러 각도로 수없이 찍어온다. 이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 몇 번이고 답사하는 것은 힘들지 않지만 사유지라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땐 구글과 유튜브에서 해당 장소와 그 주변을 검색해보곤 한다. 남이 찍어 놓은 동영상과 사진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 내 카메라 앵글에는 잡히지 않았거나 미처 놓친 부분을 참고한다. 나는 겨울에 방문했더라도 누가 봄에 찍어온 사진이라도 발견할 때면 그렇게 요긴할 수 없다. 내가 갔을 땐 볼 수 없었던 진달래로 뒤덮은 절경을 볼 수도 있고 말이다.”
─이 정도면 한국의 산이란 산은 다 가봤을 것 같은데, 훗날 금강산을 오갈 수 있게 되면 지금의 그림과는 또 다른 풍경이 그려질 거라 생각된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던 때 딱 한 번 외금강을 오른 적이 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릴 거리가 엄청 풍부해질 거다. 현대 화가들은 아직 금강산을 제대로 본 적도, 그린 적도 없는 것 아닌가. 금강산을 찾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어떻게 회화로 풀어낼 것인지는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다.”
“1999년,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던 때 딱 한 번 외금강을 오른 적이 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그릴 거리가 엄청 풍부해질 거다. 현대 화가들은 아직 금강산을 제대로 본 적도, 그린 적도 없는 것 아닌가. 금강산을 찾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어떻게 회화로 풀어낼 것인지는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다.”
Copyrights ⓒ 조선일보 & 조선교육문화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