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劇 인기 비결? 현재를 읽는 거울

  • 최보윤 기자

입력 : 2017.04.10 00:06

[국내 초연 '왕위주장자들' 대선 정국과 내용 맞물려 화제]

①동시대성 지닌 원작의 힘
②스타 연출가의 현대적 재해석
③김미혜 교수의 안정된 번역

"번역본을 한 장씩 넘기면서 크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시대를 읽는 헨리크 입센의 통찰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게 됐다."

서울시극단(예술감독 김광보)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왕위주장자들(1863)'을 택한 김광보 연출가의 말이다.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이번 작품은 왕위 계승에 확신하는 호콘왕(김주헌)과 왕위를 주장하는 스쿨레 백작(유성주), 둘 사이 갈등을 부추기는 니콜라스 주교(유연수) 등 권력을 향한 탐욕과 간계를 다룬 내용이 대선 정국(政局)과 맞물려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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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년 만에 국내 초연되는 헨리크 입센의‘왕위주장자들’. 왼쪽부터 스쿨레 백작, 주교, 호콘 왕. /연합뉴스
'근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입센의 희곡 25개 작품 중 지금까지 국내 공연작은 '인형의 집'을 비롯해 '페르 귄트' '유령' 등 11개. 국내에 많이 소개된 영미권 극작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19세기 북유럽 작가로는 상당한 인기다. '화제성'도 돋보인다. 지난 2012년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연출 박정희), 2014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사회의 기둥들'(연출 김광보), 독일 유명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베를린 샤우뷔네 극장 예술감독)가 지난해 방한해 선보인 '민중의 적'까지 작품성은 물론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얻으며 각종 연극상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입센 연극이 약진하는 이유로 동시대성을 지닌 '원작의 힘'을 꼽았다. 입센은 초기 낭만주의에서 리얼리즘, 후기 상징주의까지 넘나들며 사회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평론가 김방옥은 "입센 작품은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라 정서를 건드리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류의 작품에 비해 어렵다고 여겨왔다"면서 "전 세계적으로 불안한 정치·사회 문제가 도드라지면서 입센을 통해 현재를 읽어내려는 시도가 많아 보인다"고 말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입센 '인형의 집'을 각색한 '인형의 집: 파트 2'가 요즘 인기다. 문을 열고 나가버린 주인공 노라의 그 이후를 그렸다.

'스타 연출가'의 현대적 재해석도 입센 인기에 한몫했다. 평론가 허순자는 "오스터마이어는 시점을 현대 베를린으로 옮겨 30대 젊은이 이야기를 입히는 등 현대적 연출 문법을 구사했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위선으로 침몰하는 소도시 풍경을 담은 김광보 연출의 '사회의 기둥들'에선 당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시의성으로 눈길을 끌었다.

입센 전문가로 꼽히는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의 안정된 번역도 작품성을 끌어올렸다. 배우 이혜영은 "2012년 헤다 가블러 출연을 결정한 뒤 가장 먼저 김미혜 교수를 찾아가 작품 해석을 상의했다"고 했다. 전작(全作) 번역이 목표라는 김 교수는 "반항과 고발 의식이 강한 입센의 작가 정신이 우리 연극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