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09 03:00 | 수정 : 2015.04.09 08:27
[이해랑연극상 - 배우 길해연]
대학 때 극단 '작은신화' 창단, '돐날' '꿈속의 꿈' 등 대표작… 다양한 역할 소화하는 팔색조
"이젠 힘들단 어리광 못 피우니 어른으로서 연극하게 됐네요"
연극이 '인생의 진실을 말하는 허구'라면, 지난 2월 '먼로, 엄마'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길해연(51)의 이 대사는 마치 내밀한 고백처럼 들렸다. 그것은 늘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는 것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끼는 배우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그는 늘 무대에서 천연덕스러우면서도 화사했으며, 때론 슬픔을 삼키면서도 도도하고 우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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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요즘 들어 자괴감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큰 상을 받은 거예요. '너, 배우 노릇 계속 해도 된다'는 자격증을 받은 걸까요?" 제25회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감으로 그가 말했다. 배우가 이해랑연극상 수상자가 된 것은 4년 만의 일이다.
길해연은 어려서부터 상복이 많았다. 글재주가 뛰어나 초등학교 때는 글짓기 상장을 수집하다시피 했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풍문여고 시절에 '무덤 없는 주검'이란 연극을 봤다. 염세적인 내용 뒤에 숨어 있는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이 언뜻 보였다. 동덕여대 국문학과에 다니던 1986년, 다른 대학 극회 출신 학생들과 모여 '사고'를 쳤다. "최소한 10년을 투자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극단을 만들자!" 극단 '작은신화'의 탄생이었다.
"멋있어 보이는 건 다 하려고 했어요. 극장이 없으니 무대를 가리지 말고 공연하자, 배우와 연출의 구분을 없애자…." 여럿이서 길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고, 카페를 순회하며 연극을 하는 동안 '배우 길해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른 배우는 자기 것만 보는데, 길해연은 전체를 볼 줄 안다"는 말도 들렸다.
2001년 초연한 '돐날'은 배우 길해연의 존재감을 보여준 작품이다. 당시 연극을 본 연출가 심재찬의 말. "침착하면서도 힘 있는 그로테스크함을 겸비한 그녀는 극중 386세대의 비애와 혼돈, 막막함을 치밀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후 '양파'(2002) '꿈속의 꿈'(2008)에 출연하면서 연극계에 길해연의 이름을 확고하게 새겼다. 동인제 극단에서 시작한 연극판 특유의 끈기가 문학적 감수성과 결합하면서 "길해연만큼 다양한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배우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 됐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2007년 '물고기의 축제'를 공연할 때, 남편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3일장만 치르고 무대로 돌아와야 했다. "자살한 아들 관을 앞에 놓고 시작하는 연극이었어요. 그 상황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슬프던지…. 하지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엄마는 여기서 울지 말아야 할 것 같아, 배우는 자기 연민에 빠지면 안 되잖아'라고요." 그의 절제된 연기에 오히려 관객이 놀랐다.
그 후의 인생은 '슬퍼할 새가 없는 삶'이었다. 연극 출연, 극단 운영, 대학 강의, 연기 레슨…. 글솜씨를 살려 10여 권의 동화책을 냈고, '카트'와 '풍문으로 들었소' 같은 영화·드라마에 출연해 대중에게도 친숙한 배우가 됐다. 많은 연극인들은 그를 '술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후배들을 보듬는 통 큰 큰언니'라고 말한다. 길해연은 "이제는 더 이상 '하기 싫어' '힘들어'라는 어리광을 피울 수 없게 됐으니, 어른으로서 연극을 하게 되는 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