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치열한 삶, 누군가에겐 희극이겠지

  • 유석재 기자

입력 : 2014.09.25 01:03

체호프의 숨겨진 4대 장막극 릴레이무대 올린 연출가 전훈
이번엔 '잉여인간 이바노프'

연출가 전훈은 “체호프의 초기작들은 당대의 사회적 문제점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쓴 ‘쉬운 체호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출가 전훈은 “체호프의 초기작들은 당대의 사회적 문제점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쓴 ‘쉬운 체호프’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동진 기자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담장 너머, 희한한 이름을 지닌 소극장 하나가 올 1월 문을 열었다. '안똔 체홉 극장'. 셰익스피어 다음 간다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이름을 딴 이 극장은, 연극 2편, 페스티벌 1번, 세미나 1번을 치른 뒤 지난달 장렬하게 '전사'했다. 강남 노른자위 땅에서 고전(古典) 연극 공연을 하며 7개월이나 버틴 것이다.

짐 싸들고 나온 운영자는 연출가 전훈(49). 하지만 그는 결코 체호프 공연의 뜻을 접지 않았다. "올해 계획했던 체호프 '숨겨진 4대 장막극(長幕劇)' 중에서 이미 '검은 옷의 수도사'와 '숲귀신'을 공연했습니다. '잉여인간 이바노프'와 '부정상실(父情喪失)'은 대학로로 옮겨 곧 무대에 올릴 겁니다. 대학로에 다시 '안똔 체홉 극장'도 세울 거고요."

그는 꼭 10년 전인 2004년 '벚꽃 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 '세 자매' 등 4편을 연출한 '체호프 4대 장막극'을 1년 내내 이어갔었다. 의외로 관객 호응이 뜨거워 '바냐 아저씨'는 국립극장 무대까지 섰었다. "그때부터 10년 주기로 체호프 시리즈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도대체 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체호프인가? 그도 대학 시절엔 선배들이 다 하니까 그냥 따라서 체호프를 공부했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당최 어려워서 참…." 러시아 세프킨대학에서 힘든 유학 생활을 한 끝에서야 깨닫게 됐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타인의 삶을 연기하기 정말 좋은 희곡이 체호프 작품이더군요. 한 인물이 등장하면 대사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아온 모습이 다 드러나죠."

체호프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도 탁월했다. "제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애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둥근 해가 떴습니다' 노래에 맞춰 무용을 시켰어요. 애들은 힘들게 따라 하는데 전 그 모습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거든요. 체호프가 꼭 그래요." 체호프 희곡에서 등장인물은 고난을 겪으며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한편으론 그게 무척 우스운 희극이 된다. "삶이란 게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은 희극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잔혹한 세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는 게 체호프의 메시지입니다."

그가 올해 기획한 '숨겨진 4대 장막극'은 체호프 초기의 작품들이다. 완성도는 후기작보다 떨어지지만, 인생과 사회에 대한 체호프의 고민이 훨씬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그중 이번에 공연할 '잉여인간 이바노프'는 백수건달이자 몰락 지주인 주인공이 병든 아내 몰래 친구 딸과 바람을 피우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체호프의 막장드라마'라 할 만하다.

"그렇게 쓴 이유가 있어요. 스물일곱 살 체호프는 러시아가 겪던 사회적 문제를 대중에게 가장 빠르고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풍자적으로 썼던 겁니다." 그 '사회적 문제'란 전통의 몰락, 상인 계층의 급부상, 지식인의 무기력함, 여성해방 운동 등이었다. 어쩐지 체호프가 그다지 옛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연극 '잉여인간 이바노프' 10월 10일~12월 10일 대학로 아트씨어터 문, (02)3676-3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