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설치미술가), 전위와 도발이 따뜻해졌다

  • 도쿄=곽아람 기자

입력 : 2012.02.05 23:18

[도쿄 모리미술관서 회고전]
전라로 낙태의 고통 연기 등 센세이션 일으키던 20·30代
과거 돌아보니 "열심히 했네"… 새 작품은 기르던 개 형상화

4일 오전 도쿄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3층 모리 미술관. 통유리창으로 230여m 아래 도쿄 시내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스테인리스 스틸, PVC 패널, 우레탄 등으로 만든 강아지 형태 설치물이 유리창을 향해 아크릴·유리 비즈(구슬)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설치미술가 이불(48)의 최신작 '비밀 공유자(The Secret Sharer)'. "16년간 키운 진돗개가 이태 전에 죽었어요. 서울 성북동 집에서 작업을 하다 창밖을 보면 늙은 개가 서울시내를 보며 앉아 있다가 소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토하고선 조용히 일어서곤 했죠."

일본 모리미술관에서 전시를 준비 중인 작가 이불. 전시장에 스튜디오를 재현한 이불은“나는 예술 자체를 목표를 삼은 적은 없다. 내게 예술은 어떤 추구의 결과로 흔적처럼 나온 것일 뿐”이라고 했다. /모리미술관 제공

30대와 40대 중반을 함께한 그 개를 형상화함으로써 이불은 지난 20여년간의 작업과 자기 자신을 게워냈다. 그의 미니 회고전 '이불: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Lee Bul:From me, Belongs to you only)'가 5월 27일까지 모리 미술관에서 열린다. '최첨단 미술의 집합소'로 불리는 모리미술관이 한국 작가의 대규모 전시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발과 전위의 끝은 공감인가. 1989년 전라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낙태의 고통을 연기한 퍼포먼스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후 '앙팡 테리블' '여전사(女戰士)'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던 이불은 차분하고 정돈된 표정으로 "3년 전 연인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한 구절을 전시 제목으로 썼다. 그 구절의 따뜻함과 위안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왼쪽은 이불의 최신작 '비밀 공유자'. 오른쪽은 1989년 작 '무제'. 모리미술관 제공·도쿄=곽아람 기자

이번 전시 출품작은 모두 45점. 초기의 퍼포먼스 스틸컷을 비롯해 완벽한 몸매를 향한 인간의 갈망을 표현한 '사이보그' 시리즈(1998),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담은 '단식 예술가'(2004),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묘사한 '나의 거대한 서사'(2005) 등 이불 작업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을 망라했다. '회고전'을 열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 이불은 "내 과거가 조악해 보일까 봐 돌아본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막상 개막하고 나니 '아, 열심히 했구나' 싶다"고 했다. "20대 때의 저는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었죠. 30대 중반 이후엔 현실에 대한 분노와 함께 '왜 인간은 실패해도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가'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렇다면 지천명(知天命·쉰 살)을 목전에 둔 이 작가는 어디에 와 있을까? 그는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긴 하지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태도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설령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계속 그런 노력이 이루어지는 한 실패와 좌절, 실망감에 대해서라도 언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조 후미오(南條史生) 모리 미술관장은 "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은 지금까지 사회를 위해 그려온 미래상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점에 이상적 사회에 대해 탐구해 온 이웃 나라 이불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귀중한 참고점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