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3.14 17:49
개인전 선보이는 노상호·황수연
회화, 조각, 설치, 디지털 영상 등 다채로운 작품 출품
4월 20일까지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최근 우리 주변엔 실제 인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버추얼 휴먼이 미디어에 등장하거나, 새로 발매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에 오래전 사망한 전설적인 가수의 목소리를 따와 입히는 등의 콘텐츠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또한 AI에게 간단한 문장만 입력하면 상황에 맞는 영상과 이미지를 수없이 펼쳐 보이는 등 창작은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노상호는 이 점에 주목해 오늘날 또 다른 창작 주체로 떠오른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을 작업에 적극 활용한다. 직접 온라인 사이트를 서핑하며 이미지를 수집하고, 아날로그 회화로 재현하던 기존의 작업에서 더 나아가 AI에게 작가가 구상한 이미지를 주문한 뒤 거기서 생성된 이미지를 차용해 작품으로 끌어온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홀리’는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은 결과물이 사실적으로 보이게끔 학습돼 있지만, 동시에 기술적인 불완전함도 공존해 머리가 두 개인 사슴이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사람 같은 기이한 오류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작가는 기이한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경이로운 공포를 종교적 성스러움에 빗대어 표현한다.


이번 출품작은 겉으로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모순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면에서 자주 보이는 불타는 눈사람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커다랗게 불타는 눈사람의 형상이 자신의 주제를 함축한 상징과도 같다고 여겨 화면에 거듭 묘사하게 됐다고 밝혔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신비하고도 기이한 광경이 디지털 세상 밖의 캔버스 위에 안착한다.


작가는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얻게 되는 오류와 비현실적인 감각을 ‘기적’으로 비유하고 동반되는 정서를 표현한다. 또한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등의 경계를 탐구하고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전시 ‘홀리’는 4월 20일까지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1층, 3층, 4층에서 만나볼 수 있다.


아라리오갤러리 지하 1층에서는 황수연의 ‘마그마’가 4월 20일까지 열린다. 전시에 출품되는 3점의 입체 조각과 평면 조각 10점은 작가가 소셜미디어의 숏폼 콘텐츠에서 포착한 특정 이미지를 선별한 후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수행을 거쳐 이미지를 재해석한 작업물이다.

일상에서 쉽게 노출되는 숏폼 콘텐츠는 작가의 작업에 잠재적으로 남아있었는데, 그중 세상의 다양한 물건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에 특히 끌렸다고 한다. 따라서 작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간섭하고 그 속에서 조형적 요소를 끄집어내 현실 세계의 입체적 조각으로 이끌어 냈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 속 제작물과 작가가 탄생시킨 작품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배드민턴 라켓을 만드는 영상을 보고 만든 작품 ‘나쁜 라켓 “…”’은 영상 속 작업자의 제작 과정을 압축하고 간단화 한 영상만을 보고 작가가 그대로 따라 하기란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따라서 엉성한 듯 삐죽 빠져나간 라켓의 와이어가 있는 그대로 표현됐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조형적 고민과 시도를 더해 영상 속 작업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현실 세계에 나오게 됐다.

‘아스팔트 위의 나무늘보’도 마찬가지다. 숏폼 콘텐츠 속의 나무늘보를 보고 3D 프린트로 재현한 작품인데,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오류나 균열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작품의 일부로 노출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영상 속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재현하는 노동을 자처하며 신체적 역량 및 현실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재해석된 요소를 탐구한다.
그 어느 때보다 디지털 세상과 밀접한 지금, ‘홀리’와 ‘마그마’는 동시대를 사는 젊은 예술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이번 전시에 대해 노상호는 “이번 출품작 중 조각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내도록 특수 안료를 사용했다. 작품을 디지털 이미지로만 보기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 보는 즐거움을 주고자 했다”라고 말했고, 황수연은 “과거엔 경험을 통해 배웠다면 현재는 영상을 통해 배우는 감각이 많다. 무의미하게 소비되는 이미지에 유한한 몸을 주고 싶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