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소리치는 코리아 광대

입력 : 2009.01.20 10:24

마임 아티스트 남긍호

마임 아티스트 남긍호/사진=성남문화재단

필요한 근육만 남긴 남긍호의 몸은 군더더기가 없다.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랑 팬티 하나 입고 출연했던 그의 귀국 후 첫 작품, 마임 '키스'는 정직하게 ‘몸’에 승부수를 두었던 작품이었다. 젊은 남자의 잘 단련된 근육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던 그 무대는 지금까지도 남긍호를 기억하는 이들 속에서 상징적인 작품으로 회자된다.

프랑스의 마르셀마르소 마임학교와 코퍼럴 마임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8대학의 석사까지 마친 그가 8년 만에 ‘유학파 마임이스트’라는 별표를 가슴에 달고 금의환향할 즈음, 1990년대 중반의 한국 마임계는 60년대의 유아기를 거쳐 70~80년대의 성장기를 보내고 그 어느 때보다 마임에 대한 관심과 초점이 증폭되던 때였다.

최초의 한국마임협의회가 결성되고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마임페스티벌이 개최되면서 버젓한 공연 무대 하나 얻기도 힘들었던 마임이스트들은 바빠졌다. 그 속에서 남긍호는 ‘색깔있는’ 마임이스트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국내 무대에서는 정통 무용과 연극이 마임과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일찍이 색다른 크로스오버 무대를 열어갔고, 해외 무대의 끈도 놓지 않으면서 꾸준히 국제적인 무대를 오갔다. 2006년에는 세계적인 마임 축제인 미모스마임페스티벌에서 동양인 최초로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마임이스트로 국제적인 공인을 얻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유독 관심을 두고 창작하는 장르는 거리극이다. 

다른 마임이스트들과 달리 남긍호는 유독 장르 파괴적인 성격을 많이 가진 마임이스트다. 정통 마임의 형식만을 고수하는 마임이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무용과 음악, 연극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마임의 형태를 만들어냈던 것.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열린 시각으로 타 장르의 장점을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한 그가 거리극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거리극 장르 가운데에서도 남긍호는 현재 자신이 창단한 호모루덴스라는 컴퍼니와 함께 ‘사이트 스페서픽(site specific)’이라는 특정 공간 공연물을 국내에 정착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마임 아티스트 남긍호/사진=성남문화재단
마임 아티스트 남긍호/사진=성남문화재단

나는 한국의 광대이고 싶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던 어느 가을 저녁, 과천의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들이 갑자기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도로 한복판에 임시로 세운 철조물 위에서 벌거벗은 한 남자가 엉뚱하게 샤워를 하고 있었던 것. 벌거벗은 남자를 구경하느라 건물 창가마다 사람들이 늘어섰고, 질주하던 자동차들은 속력을 줄였다. 각자의 섬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도시의 인물을 상징화시켜 자폐적이고 병리적인 도시인의 행동을 희극적으로 묘사했던 이 작품은 남긍호의 사이트 스페서픽 퍼포먼스 '로빈슨 크루섬'이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남긍호의 죄명은 과다노출로 인한 경범죄. 21세기 대한민국 예술계의 현주소였던 셈이다.

“특정 공간 공연은 ‘왜 이 장소인가’가 중요해요. 공연 목적, 철학, 내용이 모두 공간에서부터 시작되니까요. 대개 공연예술가들의 작업은 작품을 만든 후에 공연할 장소를 찾잖아요? 그런데 사이트 스페서픽은 장소를 먼저 찾고 공연물을 장소에 맞춰 만들죠. 어떤 특정한 공간에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가 담겨있기 때문에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더 호소력 강한 작품이 될 수 있어요.”

남긍호가 극장 밖 공간을 찾기 시작한 이유는 거창한 문화 운동주의자의 무엇 따위가 아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주말마다 돈벌이를 위해 곧잘 거리극을 벌이곤 했는데, 귀국 후 지하 극장을 전전하며 지쳐있던 어느 날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 그 거리극의 흥분이 되살아났다. 낯선 사람들과의 대면, 어떤 극장에서도 불가능했던 접근 거리, 몸짓과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던 따뜻한 소통. 그 생생한 느낌이 떠오르던 순간, 온 몸의 세포가 펄떡이며 극성을 부렸다. 남긍호의 거리 선언은 그야말로 혹성 탈출에 버금가는 극장 탈출이었다.

“2006년에 프랑스의 유명한 거리극 단체인 일러토피(il o topie)와 호모루덴스가 공동 창작하는 작품이 있었어요. 그 단체의 연출가가 사회학자였는데, 작품 생산 과정에서 사회학적 관점으로 공연에 접근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였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거리극은 그 프로젝트의 영향이 큽니다.”

거리극의 가장 큰 특징은 쉽고 편안한 외피 안에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터나 집 앞 뜰, 궁궐의 연희마당 등에서 벌였던 한국의 전통 연희들(인형극, 탈춤 등)의 해학적인 성격도 그 이면에는 잘못된 사회적 관습과 규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인 면에서 만큼은 한국의 연희와 현대의 거리극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은 거리극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듯하다.

“아뇨. 전 오히려 극장을 찾는 사람이 소수라고 생각하는 걸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극장에 익숙하지 않은 게 더 일반적인 것 같아요. 우리는 야외 공간의 공연에 훨씬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거리극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지 보는 사람들은 금세 익숙해지거든요. 거리극은 어떤 면에서 우리식의 극장 공간을 찾아가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것을 회복하는 과정, 전 그런 맥락에서 거리극을 생각해요.”

2007년 여름에는 종묘 공원의 노인들과 함께 사흘 밤낮을 함께 생활하면서 '오늘같은 날'이라는 공연을 만들었고, 이는 공연계의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58시간이라는 공연 시간도, 장소도 어지간히 낯선 공연이었다. 멀뚱히 구경만 하고 앉아있는 노인들 사이를 황망하게 뛰어 다니면서 ‘쓱싹 쓱싹 특공대작전’이라는 순서에는 실제로 화장실 청소도 했고, 40여 명의 유치원 아이들의 사생대회를 열어 노인을 그린 그림을 직접 전달하는 과정도 있었다.

노인들을 직접 오디션해서 즉흥극 ‘신 이수일과 심순애’를 만들기도 했다. 노인들 속에서 소통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특정 공간 공연물이었던 셈.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한국의 공연법은 어김없이 제동을 걸었다. 종묘공원 인근의 문화재 보호를 위해 ‘시끄러운 공연은 불법’이라는 것. 공연 전날까지 공연 허가가 나지 않는 바람에 남긍호는 ‘집회 등록’이라는 웃지 못 할 우회전을 해야 했다.  

“거리극을 준비하는 과정은 편안한 극장 시설을 이용하는 경우와 천지 차이예요. 일일이 장비를 구입해야 하고 배우들도 연기 외 노가다는 기본이고, 열린 공간의 에너지라서 적응 훈련도 전혀 다르죠. 외국의 경우 대형 거리극은 한 마을의 문화까지 바뀔 수 있는데, 국내 지원 여건은 여러 면에서 너무 열악한 상태입니다.” 

거리극은 어떤 장르보다도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한 장르다. 입장료라는 수익 자체를 전혀 고려할 수 없는 공연 형태이기 때문. 그러나 ‘몸만 가지고 하는 연극’이라는 어설픈 개념 덕분에 다른 장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현실적인 지원금이 책정되기 일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거리극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그나마 다원예술분야로 뭉뚱그려 분류되고 있는지라 사이트 스페서픽같은 특정 공간 공연물은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요원하다.

우리의 내일은, 짝짝짝 짝짝

“전 마임이 출발이었을 뿐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예요. 마임이 중심이 될 수 있는 음악과 연극을 생각하고, 심지어 텍스트와의 만남도 고민해요. 마임극을 만든다면, 텍스트에 맞춰 동작을 맞추는 식이 아니라 몸짓을 먼저 만들고 그 뒤에 텍스트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식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호모루덴스의 창단 10주년을 기념한 작품으로 한창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BLIK'이라는 작품도 그의 생각처럼 구성과 연출, 텍스트가 동시에 출발한 신체극이다. 국경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추상적 개념의 국가와 국경이라는 제도가 얼마나 부조리한 발상으로 인간의 희생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프랑스 극단 MMO와 공동창작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춘천마임축제와 미모스마임축제의 후원을 받아 초연 무대를 프랑스에서 먼저 갖게 된다.

말에 대한 매력보다 몸짓의 매력을 더 크게 느끼던 남긍호의 앳된 스무 살 청춘에서부터 이미 세상의 모든 경계는 지워져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지하지 말고 움직일 것, 갇히지 말고 튕겨 오를 것, 슬플 땐 더 크게 웃어버릴 것. 놀이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사는 남긍호의 세계에는 이렇게도 ‘겁나는’ 규율이 있다. 멈추지 않는 아티스트 남긍호가 웃고 있는 한 이 무시무시한 법칙들은 언젠가 꽉 막힌 한국의 거리거리를 휘청거리게 만들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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