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23 03:11 | 수정 : 2013.04.23 09:26
['제 25회 이중섭미술상' 안창홍]
대학 진학 안한 '고졸 화가' 막노동·그림 팔며 안목 키워
내가 민중미술 작가? 나는 현실주의 작가다
어른에 희생된 아동 돕고자 상금 유니세프에 기부키로
'제25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안창홍(60)을 만나러 양평에 갔을 때,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나는 '급진보 작가' 아닌가. '이중섭미술상' 수상 통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상(賞)이란 소위 'FM(敎本)', '표준'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거라고 여겨 왔으니까.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생각했다. '작가가 일생을 걸고 세상에 발언하다 보면, 공감을 얻기도 하는구나.'"
그는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고졸(高卒) 화가',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듯 그는 '예외적'이다. "복잡한 사정 때문에" 안창홍은 부산 동아고에 입학하면서 가출했다. 고교 시절부터 여름엔 건축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겨울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내다 팔며 한 몸을 책임졌다.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그 재주로 국제시장에서 비치백 도안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형편도 어려웠고, 틀에 박힌 교육이 싫어 대학 진학하지 않고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 시절 그를 버티게 한 건 재능에 대한 믿음.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유쾌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이른바 '중앙 화단'에 그의 이름을 알린 건 1979년. 도쿄의 화랑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 그룹전에 무얼 내놓을까 고민하다가 친구 아버지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직전 찍은 부부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사진을 유화로 옮겼다. 눈과 입 대신 시커먼 구멍을 그려 '혼(魂)이 없는 인물', 나라 잃은 백성을 표현했다. 뚜렷한 의식을 가진 그림에 호응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는 이후 '가족사진' 연작을 통해 분단, 독재 등으로 소재를 넓혀가며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그렸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던 1980년대, 안창홍은 '민중미술가'로 불렸다. 1990년대엔 일러스트 스타일도 선보였고, 2011년 전시에서는 동네 사람들을 누드 모델로 세웠다.
'마이너리티'로 평가받았던 그를 지탱한 건 팔 할이 자존심이다. 그는 전형적인 '부산 싸나이', 허세는 부릴지언정 징징대진 않는다. "힘들고 지쳐도 '제대로 된 예술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나를 비주류(非主流)라 평한 건 평론가들의 감상주의"라는 말도 그런 자존심에서 나온다. "나는 항상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자부했다. 1981년 첫 개인전 때부터 그림이 팔렸다. 마니아들이 그림을 사줘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다. 상업주의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이 내게는 있다."
그는 "나는 민중미술 작가라기보다는 현실주의 작가"라고 했다. "삶의 그늘진 부분과 부조리가 영원한 내 관심사"란 것이다.
"사실 나는 '급진보 작가' 아닌가. '이중섭미술상' 수상 통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상(賞)이란 소위 'FM(敎本)', '표준'에서 우수한 사람에게 주는 거라고 여겨 왔으니까.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생각했다. '작가가 일생을 걸고 세상에 발언하다 보면, 공감을 얻기도 하는구나.'"
그는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고졸(高卒) 화가',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듯 그는 '예외적'이다. "복잡한 사정 때문에" 안창홍은 부산 동아고에 입학하면서 가출했다. 고교 시절부터 여름엔 건축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겨울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내다 팔며 한 몸을 책임졌다.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이라 불렸던 그는 그 재주로 국제시장에서 비치백 도안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형편도 어려웠고, 틀에 박힌 교육이 싫어 대학 진학하지 않고 혼자 그림을 그렸다.
그 시절 그를 버티게 한 건 재능에 대한 믿음.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나는 재능이 있으니까, 유쾌하고 씩씩하게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이른바 '중앙 화단'에 그의 이름을 알린 건 1979년. 도쿄의 화랑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 그룹전에 무얼 내놓을까 고민하다가 친구 아버지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직전 찍은 부부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사진을 유화로 옮겼다. 눈과 입 대신 시커먼 구멍을 그려 '혼(魂)이 없는 인물', 나라 잃은 백성을 표현했다. 뚜렷한 의식을 가진 그림에 호응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는 이후 '가족사진' 연작을 통해 분단, 독재 등으로 소재를 넓혀가며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그렸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던 1980년대, 안창홍은 '민중미술가'로 불렸다. 1990년대엔 일러스트 스타일도 선보였고, 2011년 전시에서는 동네 사람들을 누드 모델로 세웠다.
'마이너리티'로 평가받았던 그를 지탱한 건 팔 할이 자존심이다. 그는 전형적인 '부산 싸나이', 허세는 부릴지언정 징징대진 않는다. "힘들고 지쳐도 '제대로 된 예술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나를 비주류(非主流)라 평한 건 평론가들의 감상주의"라는 말도 그런 자존심에서 나온다. "나는 항상 내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자부했다. 1981년 첫 개인전 때부터 그림이 팔렸다. 마니아들이 그림을 사줘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다. 상업주의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이 내게는 있다."
그는 "나는 민중미술 작가라기보다는 현실주의 작가"라고 했다. "삶의 그늘진 부분과 부조리가 영원한 내 관심사"란 것이다.
불우한 천재 이중섭(李仲燮·1916~1956)과 그의 예술은 어디쯤에서 맞닿아 있을까. 안창홍은 "불행한 환경을 회화성과 익살로 녹여낸 이중섭의 삶, 그림에 대한 열정, 독창적인 기법을 존경한다. 다만 시대적 비극을 겪으면서 가족의 와해와 같은 작은 세계에만 머물렀다는 점은 나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작은 비에도 마을 어귀 개울이 해자(垓子)처럼 불어나 외부와 단절되는 양평 작업실에 24년째 살고 있다. 매일 12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서울 사는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 밑반찬을 들고 찾아온다. 안창홍은 "예술가란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대신 외로움이라는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사는 존재"라고 했다.
안창홍은 이중섭미술상 상금 1000만원을 모두 유니세프에 기부한다. "나는 상실된 인간애를 복원하겠다는 의지, 그 힘으로 작업한다. 그렇다면 그 힘의 결과인 상금 같은 건 어른들의 욕망 때문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시상식 및 수상 기념 특별전 개막식은 11월 7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는 작은 비에도 마을 어귀 개울이 해자(垓子)처럼 불어나 외부와 단절되는 양평 작업실에 24년째 살고 있다. 매일 12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서울 사는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 밑반찬을 들고 찾아온다. 안창홍은 "예술가란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대신 외로움이라는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사는 존재"라고 했다.
안창홍은 이중섭미술상 상금 1000만원을 모두 유니세프에 기부한다. "나는 상실된 인간애를 복원하겠다는 의지, 그 힘으로 작업한다. 그렇다면 그 힘의 결과인 상금 같은 건 어른들의 욕망 때문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시상식 및 수상 기념 특별전 개막식은 11월 7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