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에서 캔 희망… 탄광에도 봄은 온다

  • 손정미 기자

입력 : 2010.02.08 23:32

황재형 '쥘 흙과 뉠 땅'展
"사연 많은 탄먼지 흩날리는 곳…
붓 대신 삽을 들고서야 밥 한 숟가락의 의미를 알았다"
그런 그의 그림에서 이젠 노동보다 인간이, 이념보다 삶이 보인다

자신의 작품〈장마〉앞에 선 황재형 화백.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황재형 화백의 개인전 《쥘 흙과 뉠 땅》은 탄광촌 사람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을 보여준다. 작품에는 탄가루가 날리고 사람들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지만, 흥분하지 않고 이를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황 화백이 묘사한 탄광촌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를 겪어왔다. 그가 탄광촌에 처음 정착한 것은 1979년 무렵이었다. 중앙대 미대 재학 시절 황석영과 김지하 등의 글을 접하면서 현실을 고민했던 그는 구로공단과 창원공단을 돌면서 노동자들의 실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 정착지로 택한 탄광촌이 지금은 TV 드라마 '모래시계'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정동진이었다. 작가는 머릿속의 상상이 아니라 두 발을 직접 내려 현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붓 대신 삽을 들었고 탄가루 때문에 만성결막염에 걸려 일을 그만둘 때까지 광부로서 갱(坑)의 안과 밖을 체험했다. 그는 '햇돼지(탄광에 처음 들어온 광부를 부르는 말)'라는 소리를 들으며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갱에서 탄을 캐면서 탄광촌 사람들과 어울렸다.

처음 3년간은 익숙하지 않은 노동의 무게에 눌려 캔버스 앞에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다. 대신 틈틈이 메모하듯 탄부(炭夫)와 탄광의 모습을 그렸고, 1984년 서울 인사동 '제3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전시한 작품 〈목욕탕〉 등은 목욕하는 탄부를 그린 것으로 민중의 모습을 담은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황재형 화백의 개인전《쥘 흙과 뉠 땅》에 전시 중인〈탄먼지〉. 황 화백은 1979년부터 강원도 탄광 지역에 들어가 탄광촌의 모습을 담아왔다. / 가나아트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 작품을 작가의 1980년대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화풍(畵風)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노동보다 인간이 드러나고, 이념보다 삶이 녹아 있다. 작품 〈탄먼지〉는 '쫄딱구덩이'라고 불리는 작은 갱을 그린 것으로, 작가가 직접 3년간 일한 곳이어서 더욱 애착이 깊다. 그가 광업소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황씨 거기서 뭐해? 그거 팔면 돈 되나?"라고 소리치곤 했다. 트럭이 일으키는 탄먼지 속에 깊은 사연이 있고 슬픔과 기쁨이 숨어 있을 것 같다.

작품 〈어머님 전상서〉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누옥(陋屋)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창문에서 새 나오는 밝은 빛은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 것 같다. 못난 자식이 문을 열고 들어가 어머니를 안고 싶지만 얼른 들어가지 못하고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자식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애잔함이 묻어난다. 광부가 도시락에서 밥을 뜨고 있는 작품 〈한 숟가락의 의미〉는 작가가 20년 가까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손을 대온 것으로 작가의 세월과 애정이 녹아 있다. 작품 〈한 숟가락의 의미〉를 비롯해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상당수가 몇 년간에 걸쳐 제작됐다.

작가는 작품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추구해온 존재의 힘을 보여준다. 무심하게 세워져 있는 트럭과 가(假)건물, 겨울나무 하나하나가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흰 눈 속에 놓인 파란 드럼통이 '현실에 충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1980년대는 칼끝처럼 열정이 돋아 있던 시절이었다"면서 "이제는 삶이 의식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란 걸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에 '민중미술 작가'로 불렸던 것에 대해 "과거 민중미술을 기쁘게 수행했고 이어갈 생각도 있지만 이제는 나를 뭐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것에 속박되거나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작가는 '탄광촌을 떠날 때가 되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전시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28일까지 이어진다.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