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위 예술의 선구자’ ‘영원한 아방가르드’
여든 넘어서도 여전한 괴짜, 쇠퇴 없는 도전 정신…
5월 런던서 징과 빨랫방망이로 실험 음악 공연
1970년 백남준 작품 연출 이후 음악에 50년만의 도전
지난 9월 런던에선 걸레질 퍼포먼스 재현하기도
 

< Self Portrait 10-S 10 > 30x23cm Mixed media on wood panel 2010 /아라리오갤러리

 
선구자는 외롭다. 기이한 발상과 독특한 행보에 주변의 괄시를 받거나 괴이하다고 외면당하기 일쑤다. 때로는 질투와 시기의 대상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 폄훼 당하기도 한다. 김구림(83)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잔디밭에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태워놓고는 작품이라고 하는 둥, 광목으로 건물 한 채를 뱅 둘러싸다가 철거당하는 둥 별별 기행을 일삼으며 예술이라고 내세우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미친놈’이라고 했다.
 

1960~70년대 당시로써는 듣도 보도 못한 예술을 들고나온 탓에 경찰서에 연행되는 것은 기본, 집단 린치를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그 덕분에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1/24초의 의미, 1969),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등 ‘최초’ 타이틀을 줄줄 꿰게 됐으니 선구자는 선구자다.
 

김 화백이 지난 9월 17일 ‘아시안 퍼포먼스 아트’ 전시 오프닝에서 <걸레>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구림

 
김 화백은 DRAF(David Roberts Art Foundation)가 주최, 지난 10월 말까지 런던에서 열린 ‘아시안 퍼포먼스 아트’ 전시 오프닝에서 단독 퍼포먼스를 펼쳤다. 1960~70년대 퍼포먼스를 탐구하고 조망하는 전시로, 일본 작가 지로 타카마츠 등과 함께 참여한 그룹전이었다. 오프닝 퍼포먼스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nternational Impact Art Video′에 출품했던 영상 작품 <걸레>의 재현이었다. 아무 말 없이 상 위를 계속 걸레질하는 행위로, 이를 현장 퍼포먼스로 행하는 것은 최초였다. 전시장은 관람객으로 가득 찼고 이들은 묵묵히 걸레질하는 김구림을 숨죽여 바라봤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전시가 열리는 동안 상은 그 자리 그대로 지켰다. 전시 종료 뒤에 김 화백이 열심히 걸레질해 닦은 그 상은 DRAF 측에 소장됐다. “엄연한 작품인데 크기는 크고 무게는 무겁고… 어떻게 한국으로 가져오나 고민이었는데 DRAF에 ‘기부’해버리니 내 속이 다 후련합디다. 상 아래에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한글로 적어달라고 해서 자세히 적어주고 왔죠.”
 

전시와 연계해 소아스(SOAS)대학에서 한국 현대미술과 아방가르드에 대해 특별 강연을 열고 골드스미스대학에서는 <1/24초의 의미>에 관한 강연회가 마련되는 등 한국 전위 예술과 실험 예술의 선구자로서 대접을 톡톡히 받고 온 셈이다. 그도 그럴만한 게, 김 화백은 영국 미술계 관계자나 전공 학생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다. 테이트모던에서 그의 작품을 수 점 소장 중이며, 테이트모던 기획전에도 몇 번이나 작품이 걸렸기 때문이다.
 

<음양 8-S 123> 72.7x90.9cm Digital Print and Acrylic on Canvas 2008 /UM갤러리

 
김구림은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1970)에 출품된 백남준의 퍼포먼스 작품 <피아노 위의 정사>를 파격적으로 연출해 객석을 술렁이게 했다. 무대 한가운데 막이 내려진 사이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고, 막 아래로 삐져나온 남녀의 다리 네 개가 뒤엉켜 마구잡이로 움직이며 건반에서 내는 소리를 감상하는 공연이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김구림은 본격적으로 전위 음악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오늘날까지 50년이 훌쩍 지나버린 것. “음악을 제대로 못한 한이 그때부터 쭉 쌓여있는 거지. 그래도 드디어 그 마음속 덩이를 풀 수 있게 됐어요.”
 

그는 오는 5월 런던 실험음악공연장 Cafe OTO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오노 요코 등 세계 유명 전위 예술가들이 올랐던 바로 그 무대다. 예술 이야기를 할 때면 여든을 넘긴 노장의 눈이 여전히 희번덕이는데, 음악 이야기에는 더욱 상기된 얼굴이다. “생각만으로도 아주 설렙니다. 어떤 음악을 어떻게 얼마만큼 할 것인지는 연주자인 내 재량에 달려있죠. 지금 생각으론 두세 곡 정도 공연할까 싶어요.” 주 악기는 징과 빨랫방망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1월까지 런던에 체류하며 작업한 최신작. 그는 기계에 아주 밝고 각종 전자기기 조작에 능숙하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도 완벽하게 섭렵한다. 사진의 화질이 다소 떨어져 보이는 이유는 고성능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 아닌, 김 화백이 자신의 태블릿PC로 직접 찍은 까닭이다. 그는 작품 사진 촬영도 직접하곤 한다. /김구림

 
인터뷰 도중 그가 지난해 런던에서 머물며 작업한 작품들을 내보였다. 몸과 마음이 지친 때 머문 런던이었기에 소일거리 삼아 ‘시간 나는 대로 아무것이나 끄적거려’ 본 것이란다. “런던 시내를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공짜 신문을 구하기 쉬워 재료로 삼아봤습니다.”
 

김 화백이 이전부터 강조해오던 것은 시대에 따라 작품도 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대성과 장소성을 작품 속에 동반하고 이를 반영해야 함을 노(老)화백은 항상 염두에 둔다. 런던에서 작업한 일련의 신문지 작품들 역시 그런 의미에서 제작됐다. 여성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이를 뻔히 알면서 신문지 속 여성들의 의미에 관해 물었다. “런던의 여성상을 표현해보고자 했는데… 뭐, 그 표현이 잘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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